필사 - 시

창호지 - 민용태

나안 2021. 3. 26. 16:35

창호지
                                         민용태
 
우리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것은
이 얇다란 종이 하나
북풍이 칼날을 휘둘러도
우리는 이 창호지 하나를 방패로
겨울을 난다
구름의 포를 뜬 창호지는
그러나 작은 바람결에도 곧잘 약하게 운다
실은 창호지는 눈물에 약하다
작은 눈물바람에도 가슴이 허문다
푸른 하늘에 연이 되고 싶었을까
고명한 선비의 붓 끝에
영생을 얻고 싶었을까
창호지는 연한 풀잎의 힘줄이 드러나 보인다
갈기갈기 찢기울지언정 부서지지는 않는다
차라리 상여 위에 꽃으로 필지언정
그 자리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깃발이 되어
펄럭이며 소리치는
실은 대기의 사촌쯤 되는
우리네 하얀 마음
너의 나의 등불을 지키는 것도
실은 이 얇다란 창호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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