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가구 - 도종환

나안 2023. 10. 4. 14:26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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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잃은 사이

함께 사는 것이 늘 함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도종환의 시 「가구」는 오래된 부부 사이의 침묵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서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 자리는 점점 ‘가구’처럼 움직이지 않는 고정물이 되어버린다.

가끔 마음이 흔들려 다가가 보지만,
삐걱대는 소음과 어색함만이 남는다.
무엇을 찾고 들어섰는지 잊고 돌아서는 장면은
소통이 끊긴 관계의 쓸쓸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 시가 무서운 건,
그 누구도 분노하지 않고
그 누구도 상처를 들추지 않은 채
그저 ‘육중하게 어두워지고’만 있다는 점이다.
마치 사랑이 아니라, 감정의 무게가 관계를 붙잡고 있는 듯하다.

말을 잃은 사이.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지만, 더는 열지 않는다.
서로가 서랍이고, 장롱이고, 닫힌 문이다.
그래서 더욱 고요하고, 그래서 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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