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고요의 입구 - 신현락

나안 2019. 5. 25. 10:23




고요의 입구

신현락


개심사 가는 길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

나무들 서둘러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

추위를 털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길도 금세 눈으로 소복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길에서 나는

몇 번이나 개심(改心)하였을까

한 송이 눈이 도달할 수 있는 평심(平心)의 바닥

그것을 고요라고 부를까 하다가

산문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느 자리, 어느 체위이건 눈은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이 고요한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허지만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저지른 저 고요의 영역 표시

경계 앞에서도 어쩔 수 없는 방심(放心) 뒤에 진저리치던

나의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

하물며 개심(開心)이라니!

 

그 구멍의 뿌리 모두 바닥에 닿아 있으므로

길은 불평의 바닥이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 하지 말자

눈이 내렸을 뿐 나는 아직 고요의 입구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