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어둠도 자세히 보면 환하다 - 김기택

나안 2019. 8. 13. 14:33

 

 

 

어둠도 자세히 보면 환하다

김기택

 

문 하나 없던 낡은 월세 자취방. 
한낮에도 어둠이 빠져나가지 못하던 방. 
아침에 퇴근하여 햇빛을 받고 들어가면 
직사광선이 일제히 꺾이어 흩어지던 방. 
잠시 눈꺼풀에 낀 잔광도 
눈을 깜빡거리면 바로 어둠이 되던 방. 
퀴퀴하고 걸쭉한 어둠이 항상 고여 있던 방. 
방에 들어서면 눈알이 어둠속에 깊이 박혀 
이리저리 굴려도 잘 돌아가지 않던 방. 
어둠이 보일 때까지 
어둠속의 무수한 빛과 색깔이

내 눈을 발견할 때까지 
오래오래 어둠의 내부를 들여다보던 방. 
자세히 보면 어둠도 환하게 보이던 방. 
방안의 온갖 잡동사니들이 큰 숨을 들이쉬며 
느릿느릿 어둠을 빨아들였다가 
제 속에 든 빛을 오래오래 발산해주던 방. 
보잘것없는 물건들이 서로 비춰주고 되비쳐주며 
제 안에서 스스로 발광하는 낮은 빛을 
조금씩 끊임없이 나누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