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자화상 - 유하
나안
2019. 9. 22. 09:39
자화상
유하
텅 빈 양재 천변 길, 오늘도 자전거를 달린다
밤새 내린 비에 없었던 지렁이가 보이고
송장메뚜기 한 마리 풀쩍 잡초 속으로 날아간다
아내는 직장에 간 시간
나는 자전거나 타면서 고작 지렁이도 익사를 할까
쑥부쟁이는 쑥과 뭐가 다른가 따위의 사소함을 붙들고 있다
몇 년째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자전거 위에서 몇 편의 시를 구상했을 뿐
언제나 핵심을 피해 왔다
시험 전날 만화방에 앉아 있는,
목적지를 놔두고 샛길에서 해찰하는 아이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의 가슴엔 늘 쓸모없는 것들만 다녀간다
가을 빛에 젖은 억새풀과 노란 은행잎 몇 개
길 옆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소학교에선 운동회가 한창이다
내 자전거엔 어느새 함성 소리처럼 날개가 돋아
유년의 운동회로 나를 데려간다
은빛 운동장 저편엔 젊은 날의 어머니가 있고
그녀와 이인삼각으로 달려가는 어린 날의 내가 있다
내 자전거는 해질녘이 되어서야 붉게 물들어
정적 속의 내게로 되돌아온다
세상을 삼킬 것 같았던 어제의 열망은 이제
나의 몸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노는 자여
나는 이미 오래전에 예감했었는지도 모른다
집으로 저물어 돌아가는 나의 자전거가
텅 빈 가을 하천의 사소한 풍경을 완성시키고 있는 이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