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빈둥빈둥 - 문정희

나안 2020. 11. 14. 10:24

빈둥빈둥

​                       문정희

 

나를 방목한다

빈둥빈둥

내가 사랑하는 어슬렁어슬렁이다

모래와 모래 사이

창조가 넝쿨처럼 뻗쳐 오는 것도

버겁고 시들해서

속도와 움직임 다 버린다

그냥 햇살

그냥 해찰이다

시간의 독재가 다그치는 교훈들과 강요

흔한 정보와 움직임에 대한 예찬

의미와 의미로 덧없는

생산과 숫자에 나는 멍들었다

잠언들의 경고와 속삭임을 벗어나

채찍 앞에 무릎을 휘청이는 나

일어서라, 파이팅! 파이팅!

일어서서 어디로 가란 말인다

나는 모르겠다, 몰라도 좋다

피 묻은 마우스를 뱉고 가죽 글러브를 벗고

빈둥빈둥 햇살 속으로

이베 벌거벗은 너만 오면 된다

사과만 나눠 먹으면

통쾌하게 에덴에 당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