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희망이 외롭다 - 김승희
나안
2021. 2. 8. 17:48
희망이 외롭다 김승희 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아, 절망은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돼지가 삼겹살이 될 때까지 힘을 다 빼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는걸 뭐...... 그래도 머리는 연분홍으로 웃고 있잖아,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 희망은 때로 응급처치를 해주기도 하지만 희망의 응급처치를 싫어하는 인간도 때로 있을 수 있네, 아마 그럴 수 있네, 절망이 더 위안이 된다고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찬란한 햇빛 한 줄기를 따라 약을 구하러 멀리서 왔는데 약이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믿을 정도로 당신은 이제 병이 깊었나, 희망의 토템 폴인 선인장...... 사전에서 모든 단어가 다 날아가버린 그 밤에도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고 의자 앞에 조용히 서 있는 파란 번개 같은 그 순간에도 또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왜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느냐고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더 외로운 순간들이 있다 희망의 토템 폴인 선인장...... 피가 철철 흐르도록 아직, 더, 벅차게 사랑하라는 명령인데 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이유 없이 나누어주는 저 찬란한 햇빛, 아까워 물에 피가 번지듯 희망과 나, 희망은 종신형이다 희망이 외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