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을 생각하며 - 유안진
유안진 시인의 「계란을 생각하며」는 짧은 시 속에 깊은 깨달음을 품고 있다. 시인은 한밤중 멍하니 앉아 있는 장면에서 출발해, 타인의 시선과 스스로의 성찰, 외부의 강제와 내부의 각성을 조용히 대비시킨다. 그 속에는 ‘줄탁동시(啐啄同時)’의 깊은 의미가 절묘하게 숨어 있다.
줄탁동시는 병아리가 알에서 나올 때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줄(啐)**이라 하고, 어미닭이 밖에서 쪼아 돕는 것을 **탁(啄)**이라 한다. 줄탁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알은 깨지고 병아리는 탄생한다. 어느 한 쪽의 시기나 균형이 맞지 않으면 생명의 탄생은 이루어질 수 없다.
유안진 시의 "남이 터트려 주면 프라이감이 되지만 / 나 스스로 터트리면 병아리가 되지"라는 구절은 이 줄탁동시의 핵심을 환기시킨다. 삶도 그렇고, 성장도 그렇다. 누군가가 억지로 껍질을 깨뜨리면 그것은 타인의 욕망에 의한 조작일 수 있고, 삶의 본질을 놓친 변형일 수 있다. 하지만 내 안의 성찰, 내 안에서부터 치고 나오는 변화는 비로소 ‘병아리’, 즉 생명 그 자체가 된다.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의 시선이나 판단에 흔들리고, 남이 정해준 껍질 속에서 살아간다. 그 껍질을 누군가가 깨주기를 기다리기도 하고, 어쩌면 그 안에 갇힌 채 스스로 움직일 용기도 잃는다. 그러나 시인은 말한다. 내가 나를 헤아려야 한다, 그것이 성찰이며, 스스로 터뜨려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변화라고.
환골탈태(換骨奪胎). 뼈를 바꾸고 태를 새롭게 한다는 말은 겉모습만 바꾸는 변장이 아니라, 본질의 변화이자 다시 태어남이다. 줄탁동시의 힘도 바로 거기에 있다. 내가 안에서 쪼고, 세상은 때를 맞추어 응답해줄 때, 우리는 진정한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계란을 생각하는 일은 결국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시인의 멍한 밤은 그래서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알을 치는 시간이다. 나도 지금 껍질 속에서 무엇을 깨뜨리려 하고 있는지, 어미닭은 근처에 있는지, 혹은 아직 줄(啐)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다시, 오늘을 병아리처럼 시작해보고 싶어진다.

계란을 생각하며
유안진
밤중에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다
남이 나를 헤아리면 비판이 되지만
내가 나를 헤아리면 성찰이 되지
남이 터트려 주면 프라이감이 되지만
나 스스로 터트리면 병아리가 되지
환골탈태(換骨奪胎)란 그런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