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아버지의 등, 아들의 눈
내 어린 시절엔 목욕탕이란 게 없었다.
면 소재지에서도 멀리 떨어진 농촌 마을,
온천이니 욕탕이니 하는 건 우리 삶의 언저리에조차 없던 말이었다.
엄마 손 잡고 여탕에 간 일도,
아버지와 나란히 목욕탕에 간 기억이 있을리 없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등을 안다.
그건 물 속에서가 아니라
들일 끝에 돌아온 마당,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상체를 드러낸 채
수도가 아닌 펌프에서 뽑아 올린 물을 받아 놓고
내게 “등 좀 시원하게 해 봐라” 하시던 그 순간에 봤다.
어린 손으로 조심스레 찬물을 끼얹으면
“어이구, 시원하다” 하시며
등을 잔뜩 활처럼 구부리셨다.
그 순간, 아버지는 온 세상의 짐을 조금 내려놓은 얼굴이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 등을 바라보며,
그 무언의 말들을 하나씩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단순한 등목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와 교감하려 한 방식이었다.
말로는 잘 하지 못했던 당신이
온몸으로 들려주던 하루의 무게,
삶의 피로, 그리고 그 안에 숨은 다정함.
그 아버지가 이제는 없다.
시간은 흘러 나는 어느새
아버지의 나이를 훌쩍 넘긴 중년 혹은 노년이 되었고,
이제 내 아들들을 바라보는 입장이 되었다.
아이들은 다 컸다.
그들도 말이 없다.
그건 어쩌면 내 탓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처럼 나도 말보단 눈빛과 행동으로 마음을 전하려 했고,
그러다 보니 우리 가족은
조용한 사람들만 남은 셈이다.
가끔은 아들들과 목욕탕에 함께 가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아무 말 없이 등을 밀어주며,
이 등에도 삶의 흔적이, 고단함이,
그리고 너희를 향한 미련한 사랑이
깊이 새겨져 있다는 걸 전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기회는 자꾸만 미뤄지고,
어느새 주말은 각자의 약속에 흩어진다.
그저 땀에 젖은 셔츠를 벗고 돌아왔을 때
“힘들었지?” 한 마디 꺼내줄 용기조차
이제는 서투르다.
그래도 바란다.
언젠가 내 아들도
나의 등을 바라보며
말없이라도 내 고단함을, 내 사랑을
이해해주기를.
그리하여 어느 늦은 오후,
어쩌면 아주 우연히,
내 등에 손을 얹고
“시원하지?” 하고 물어주는 날이 온다면—
나는 그 순간, 아버지처럼
“어이구, 시원하다” 하고
하루의 무게를 벗듯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등이
내 등을 지나
내 아들의 손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에 말보다 깊은 사랑도 있다는 걸
우리가 서로의 등을 통해
배워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