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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비에게 - 정호승

굴비에게정호승 부디 너만이라도 비굴해지지 말기를강한 바닷바람과 햇볕에 온몸을 맡긴 채꾸덕꾸덕 말라가는 청춘을 견디기 힘들지라도오직 너만은 굽실굽실 비굴의 자세를 지니지 않기를무엇보다도 별을 바라보면서비굴한 눈빛으로 바라보지 말기를돈과 권력 앞에 비굴해지는 인생은 굴비가 아니다내 너를 굳이 천일염에 정성껏 절인 까닭을 알겠느냐정호승 시인의 시 “굴비에게“는 거센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비굴해지지 않고 꼿꼿한 품위와 절개를 지키고자 하는 엄숙한 의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은 천일염에 절여지는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건조되어 가는 생선을 의인화하여, 불의와 타협하는 세속적 삶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진정한 인간적 가치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시련과 유혹에 직면한다. 특히 돈..

필사 - 시 2026.05.05

강물 - 정호승

강 물​정호승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물이다사랑의 용서도 용서함도 구하지 말고청춘도 청춘의 돌무덤도 돌아보지 말고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길이다흐느끼는 푸른 댓잎 하나날카로운 붉은 난초잎 하나강의 중심을 향해 흘러가면 그뿐그동안 강물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내가 아니었다 절망이었다그동안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강물이 아니었다 희망이었다정호승의 「강물」은 삶을 억지로 붙잡지 말라는 말처럼 읽힌다. 물은 흐르기 때문에 물이고, 길도 흐르기 때문에 길이다. 시인은 사랑도, 용서도, 청춘도, 절망도 붙잡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체념이 아니라 더 깊은 순응에 가깝다. 강물이 흘러가는 것은 아무 뜻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바다를 향한 뜻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巖下細泉達海意(암하세천달해..

필사 - 시 2026.05.05

겨울나기 - 고재종

겨울나기 고재종 방안에서조차 콧김이 서리는 밤 곳간 속 시렁에 걸린씨오쟁이 속의 나락씨 토란씨들은서로의 몸을 비비고 있으리 덕석을 쓰고도 혼자서는 떨려와서하마 몇번씩이나 영각을 쓰던 외양간 부사리는, 이제쯤새어드는 달빛을 무척은 쳐다보리 큰눈이라도 내렸으면 좀 좋으련만뒷들 보리밭의 애보리싹들은또 파랗게 파랗게 얼어서는고독의 절정을 견디고 있기는 하리 또또 마음 하나 잘못 잡으면송두리째 넘어갈 삭풍 속에서되레 그 여린 우듬지 끝에형형 별을 이고 서 있을 미루나무여 겨울을 겨울답게 나는 것들은뒷산 봉우리처럼 조금은 높고그 끝에 둔 꿈처럼 조금은 외롭고그걸 보는 정신처럼 조금은 성성하리

필사 - 시 2026.03.12

옛 노트에서 - 장석남

옛 노트에서장석남 그때 내 품에는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바람이 풀밭을 스치면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이 세계 바깥까지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좇아서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그때는 내 품에 또한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옹색하게 살았던가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우연히 들춰본 옛노트에서 옹색하게 살았던 그 시절의 기록을 지금 다시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 된 과거의 나'를 대면하는 일이다. 그때는 세상을 다 뒤흔들 것 같았던 고민이나 혹은 누군가를 향한 절절한 마음이, 지금의 '익은 앵두' 같은 시선으로 보면 참으로 투명하고도 아련하게 다가오곤 한다.잉..

필사 - 시 2026.03.12

멈추지 마라 - 양광모

멈추지 마라양광모비가 와도가야할 곳이 있는새는 하늘을 날고눈이 쌓여도가야할 곳이 있는사슴은 산을 오른다길이 멀어도가야할 곳이 있는달팽이는 걸음을 멈추지않고길이 막혀도가야할 곳이 있는연어는 물결을 거슬러 오른다인생이란 작은 배그대,가야할 곳이 있다면태풍이 불어도 거친 바다로 나아가라멈추지 마라삶이 버거울수록 사람은 빠르게 달리는 방법보다, 멈추지 않는 방법이 더 필요하다 비가 와도 새는 날고, 눈이 쌓여도 사슴은 산을 오르고, 길이 멀어도 달팽이는 움직이고, 연어는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세상에는 원래 쉬운 길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잘 가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빠른 존재도 있고 느린 존재도 있지만,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제 길을 간다. “왜 이렇게 느린가?”가 아니라 “지금도 가고 ..

필사 - 시 2026.02.24

작은 연가 - 박정만

작은 연가 박정만 사랑이여, 보아라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유수(流水)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가다가다 밤이 와우리가 마지막 어둠이 되면바람도 풀도 땅에 눕고사랑아, 그러면 저 초롱을 누가 끄리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우리가 하나의 어둠이 되어또는 물 위에 뜬 별이 되어꽃초롱 앞세우고 가야 한다면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눈 밝히고 눈 밝히고 가야 한다면

필사 - 시 2026.02.24

내가 바라는 세상 - 이기철

내가 바라는 세상이기철이 세상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꽃모종을 심는 일입니다한 번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들이 길가에 피어나면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꽃을 제 마음대로 이름지어 부르게 하는 일입니다아무에게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이 혼자 눈시울을 붉히면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그 꽃에 다가가시처럼 다뜻한 이름을 그 꽃에 달아주는 일입니다부리가 하얀 새가 와서 시의 이름을 단 꽃을 물고 하늘을 날아가면그 새가 가는 쪽의 마을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일입니다그러면 그 마을도 꽃처럼 예쁜 이름을 처음으로 달겠지요그러고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이미 꽃이 된 사람의 마음을 시로 읽는 일입니다마을마다 살구꽃 같은 등불 오르고식구들이 저녁상 가에 모여 앉아 곷물 든 손으로 수저..

필사 - 시 2026.02.22

눈길 - 정두리

눈길정두리땅끝 어디에서 밝힌 불일까?하얗게 밝혀진눈길을 걷는다.하얀길에누가 먼저 갔을까?점 하나, 점 둘눈 위를 더딜 때두려웠겠다.앞장서서 걷기가힘들었다고깨끗한 길 걸어가기조심스러웠다고누군가눈길 위에다내가 알기 쉽도록한 자, 한 자마음을 표시해 놓고 갔었다.눈 내린 길을 걷는 장면보다 먼저 마음이 고요해진다. 하얗게 열린 길, 점 하나 점 둘 찍힌 발자국, 그리고 그 발자국을 따라 천천히 걷는 사람. 말은 많지 않은데, 그 적은 말들 사이로 오래 살아낸 시간의 온기가 배어 나온다. 요즘 나는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항상 마음은 쉬고 싶고 떠나고 싶어도 현실은 쉽게 자리를 비워주지 않는다. 앞만 보고 살아온 시간이 길어서인지, 문득 멈춰 서면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누구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뒤늦..

필사 - 시 2026.02.22

동야독서시자율(冬夜讀書示子聿)- 육유(陸游)

동야독서시자율(冬夜讀書示子聿), 육유(陸游·1125∼1210)겨울밤 책을 읽다가 아들 율에게 알려주다 古人學問無遺力(고인학문무유력)少壯工夫老始成(소장공부노시성)紙上得來終覺淺(지상득래종각천)絶知此事要躬行(절지차사요궁행) 옛사람들은 학문을 함에 온 힘을 다하였고젊어 공부한 것을 늙어서야 비로소 이루었다책에서 얻은 건 끝내 부족하다는 걸 깨닫거니이 일을 진정 알려면 몸소 이행해야 하리실천으로 완성하는 지혜의 무게 학문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배움’이란 무엇인가. 남송의 시인 육유(陸游)는 추운 겨울밤, 아들 율(聿)에게 시 한 편을 전한다. 바로 〈동야독서시자율(冬夜讀書示子聿)〉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옛사람들은 학문을 함에 온 힘을 다하였고, 젊어 공부한 것을 늙어서야 비로소 이루었다"며 배움의 과정에 필..

필사 - 기타 2026.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