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말 심보선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선 너머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 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 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주워 주위에 빙 둘러 놓았습니다. 물론 하루도 채 안 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혹은 어느 무심한 발길에 의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나는 내가 낳아본 적도 없는 아기처럼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평선이나 고향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양 `너는 말이야' , `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
심보선 시인의 「‘나’라는 말」을 읽고 나면, ‘나’라는 말이 이렇게 애틋하고 섬세한 감정의 언어였던가 싶어진다.
우리 모두 하루에도 수없이 말하고 쓰는 ‘나’라는 단어.
하지만 이 시에서는 그 익숙한 말 하나가 고독, 애정, 존재, 그리고 관계의 깊이를 통과하며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라는 첫 문장에서 이미 시인은 이 단어에 대한 거리감과 불편함을 털어놓는다.
인생이란 이름의 거대한 도박판에 어쩔 수 없이 걸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판돈 같은 존재.
나, 자기 자신. 그것은 때론 너무 작고, 연약하며, 고립된 존재처럼 느껴진다.
시인은 ‘나’를 고독한 한 사람의 이름으로 바라본다.
지평선처럼 아득하고, 지평선 너머에 있는 고향처럼 멀고 외로운 이름.
하지만 이 시에서 가장 마음이 움직인 부분은 ‘흙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 놓은 “나”라는 말’이다.
그 ‘나’라는 글자를 본 시인은 말없이 그것을 보호하려고 자갈을 주워 둥글게 둘러준다.
그 행위 자체가 너무 다정하다. 아무도 보지 않았을 작은 행위지만, 그 안에는 ‘나’라는 존재를 향한 연민과 연결의 바람이 담겨 있다.
그 누군가의 ‘나’가 시인의 ‘나’와 연결되었고, 그렇게 타인의 ‘나’를 돌보는 일은 곧 자신의 ‘나’를 소중히 여기는 일이 된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나’라는 말이 진짜 의미를 갖는 순간은 혼자일 때가 아니라, 누군가가 ‘너’라고 불러줄 때라고 말한다.
내 존재가 누군가의 시선과 말, 기억을 통해 세상에 닿고, 그렇게 이름 붙여질 때,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너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지평선도 고향도 아닌 지금 여기에 있는 따뜻한 온기다.
그 말 하나로 시인은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잠”에 들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시를 읽고 나니, 어느 흙길 위에 "나"라고 써보고 싶어졌다.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어쩌면 그 누군가의 "너"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나'라는 말이 더 이상 고립된 단어가 아니라, 서로를 향한 부름이 되기를 바라면서.
결국, 우리는 서로의 “너”가 되어야만
진짜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이 시가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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