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별사 - 정일근

나안 2021. 3. 7. 10:44

이 시는 단순한 이별의 노래가 아니다. 이승에서 사랑이 끝난 뒤에도, 꽃나무와 은어로 다시 만나겠다는 서정적이고도 애틋한 환생의 약속이다. 그대는 복사꽃 나무가 되고, 나는 한 마리 은어가 되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승의 사랑이 끝났어도 천 년이 지난 먼 봄날 다시 만나겠다는 이 다짐은 경주라는 시간의 고도에서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나는 시를 읽으며 소월천, 오십천을 거슬러 오르는 은어가 되어 경주의 남산을 떠올렸다. 그곳은 신라 천년의 숨결이 서린 곳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복사꽃등불 아래, 흐드러지게 핀 꽃그늘에 은어 한 마리가 멈춰 서서 펑펑 울고 있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진다. 사랑했던 사람의 꽃그늘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 이유도 모른 채 하염없이 울게 되는 그 슬픔이 경주의 시간 속에서 천천히 번져가는 것 같다.

시인은 이별을 “경계 없는 슬픔”이라 했다. 나를 휘감는 연분홍 비단 같은 슬픔. 경주는 그런 도시다. 눈앞의 풍경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아름다움 속에 수천 년의 눈물과 미소가 함께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곳의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물길 하나에도 사람의 생과 사, 사랑과 이별이 스며 있다.

이 시를 읽으니 오십천을 따라 걸어 올라가다가 복사꽃이 환하게 핀 어느 나무 아래 멈춰 서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참을 서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사랑했던 사람의 꽃그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울어보고 싶다. 아득한 시간의 경계 위에서, 나도 모르게 스미는 슬픔과 마주하면서.

경주라는 도시는 그런 자리를 허락해주는 곳이다. 그냥 머물러 있어도 되는 곳, 눈물의 이유를 묻지 않는 곳,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곳.
이 시 한 편이 내게 경주로 가야 할 이유를 새로 만들어 주었다.

봄날 복사꽃등불 아래, 그대와 마주친 은어 한 마리의 눈빛을 찾으러.

 
별사 別辭 -경주 남산 ·37
                           정일근
 
  우리 이승의 사랑 끝나고 그대는 죽어 복사꽃 나무가 되리라 나는 죽어 한 마리 은어가 되리라
  사랑이여 천 년이 지난 봄날 먼, 먼 어느 봄날 그대 온몸에 복사꽃등불 밝힐 때
  나는 몸속 수박향 숨기고 소월천 거슬러 오십천 따라 올라가다 강물에 어루숭 어루숭 잠긴 그대의 꽃그늘 그냥 지나치지는 못하리라
  나를 휘감는 연분홍 비단 같은 슬픔에 까닭도 모른 채 펑펑 울며 거기 멈추어 서 있을 것이니
  사랑이여 그대 또한 그러하리라
  꽃그늘에 울고 있는 한 마리 어린 은어를 보며 꼭 한 번 어디선가 눈 맞춘 것 같은 작은 물고기의 눈물을 보며
  무엇인가 아뜩하여 경계 없는 슬픔에 그대가 피운 가장 아름다운 꽃 분홍 꽃잎 몇 장 손수건으로 하늑하늑 날려줄 것이니
  사랑이여 사랑하였으니 진실로 그러하리라

 

'필사 -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비명 - 박선희  (0) 2021.03.07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0) 2021.03.07
이별 이후 - 문정희  (0) 2021.03.07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0) 2021.03.07
사랑 - 박형진  (0) 2021.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