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 함민복 손가락이 열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손가락 열 개를 가만히 바라본다. 우리는 태어나기 훨씬 전, 어둡고 고요한 물속에서 그것들을 만들고 있었다. 단순히 세상을 움켜쥐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먼저 받은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서. 열 달 동안의 체온, 고요히 전해지던 심장 박동, 아무 말 없이 나를 감싸주던 부드러운 파동들. 그 모든 것을 세어 담기 위해 작고 연약한 손끝이 하나씩 피어나 열 개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본래부터 선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품속에서 받은 사랑을 세상에 내놓으려고, 그 사랑의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고 손가락마다 따뜻한 빛을 쥐고 태어난다. 아마도 성선설은 머리로 증명하는 철학이 아니라, 손끝으로 기억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
부모 김소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랴 |
낙엽이 바람에 쓸려 우수수 떨어지던 늦가을 저녁, 겨울의 긴 밤이 시작되던 날이었다. 엄마와 나, 둘이 앉아 조용히 옛이야기를 들었다. 마당에 바람이 부는 소리, 아궁이 속 불 타는 소리, 그 사이를 헤집고 엄마의 목소리가 내 귀 속으로 들어왔다. 그때 나는 몰랐다. 왜 그 이야기가 그토록 정겨운지, 왜 엄마는 같은 이야기를 해마다 들려주셨는지. 그저 긴 밤을 달래는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나 또한 부모가 된 지금에야 알겠다. 그때의 목소리 속에는 한 생명을 품고 기른 시간, 다시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랑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는 것을. 부모의 마음은,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 저녁처럼, 살아본 뒤에야 그 빛깔과 향기를 알아차릴 수 있는 법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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