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성선설 - 함민복, 부모 - 김소월

나안 2019. 4. 4. 15:45

 




성선설
함민복
손가락이 열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손가락 열 개를 가만히 바라본다.
우리는 태어나기 훨씬 전, 어둡고 고요한 물속에서 그것들을 만들고 있었다.
단순히 세상을 움켜쥐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먼저 받은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서.

열 달 동안의 체온,
고요히 전해지던 심장 박동,
아무 말 없이 나를 감싸주던 부드러운 파동들.
그 모든 것을 세어 담기 위해
작고 연약한 손끝이 하나씩 피어나 열 개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본래부터 선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품속에서 받은 사랑을 세상에 내놓으려고,
그 사랑의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고
손가락마다 따뜻한 빛을 쥐고 태어난다.

아마도 성선설은
머리로 증명하는 철학이 아니라,
손끝으로 기억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부모
김소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랴
낙엽이 바람에 쓸려 우수수 떨어지던 늦가을 저녁,
겨울의 긴 밤이 시작되던 날이었다.
엄마와 나, 둘이 앉아 조용히 옛이야기를 들었다.
마당에 바람이 부는 소리, 아궁이 속 불 타는 소리,
그 사이를 헤집고 엄마의 목소리가 내 귀 속으로 들어왔다.


그때 나는 몰랐다.
왜 그 이야기가 그토록 정겨운지,
왜 엄마는 같은 이야기를 해마다 들려주셨는지.
그저 긴 밤을 달래는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나 또한 부모가 된 지금에야 알겠다.
그때의 목소리 속에는
한 생명을 품고 기른 시간,
다시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랑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는 것을.


부모의 마음은,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 저녁처럼,
살아본 뒤에야 그 빛깔과 향기를 알아차릴 수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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