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들길을 걸으며 - 나태주

나안 2020. 12. 7. 13:29

들길을 걸으며
           나태주


세상에 와 그대를 만난 건
내게 얼마나 행운이었나
그대 생각 내게 머물므로
나의 세상은 빛나는 세상이 됩니다
많고 많은 세상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
이제는 내 가슴에 별이 된 사람
그대 생각 내게 머물므로
나의 세상은 따뜻한 세상이 됩니다.

어제도 들길을 걸으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들길을 걸으며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제 내 발에 밟힌 풀잎이
오늘 새롭게 일어나
바람에 떨고 있는 걸
나는 봅니다
나도 당신 발에 밟히면서
새로와지는 풀잎이면 합니다
당신 앞에 여리게 떠는
풀잎이면 합니다.

동네에 있는 신대저수지를 따라 걷다 만난 왜가리는 참 묘한 느낌을 주었다. 한여름의 햇살 아래, 물가에 홀로 서 있는 그 모습이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다가왔다. 처음 만난 사이일터인데 낯설지 않았다. 고요한 저수지와 찰랑이는 바람 사이에 딱 한 마리 왜가리가 서 있는 풍경은,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나태주 시인의 "들길을 걸으며"가 떠올랐다.
“세상에 와 그대를 만난 건 내게 얼마나 행운이었나”라는 첫 구절이 왜가리와 눈 마주친 그 찰나에 내 마음 같았다.
그저 스쳐가는 장면일 뿐인데도, 그대라는 존재가 내게 머무는 순간 세상이 빛나고 따뜻해지는 경험. 시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을 그렇게 노래했지만, 나는 그 왜가리를 통해 자연과의 소소한 인연도 같은 결이라 느꼈다.

어제도, 오늘도 들길을 걸으며 시인은 “당신”을 생각한다고 한다.
그 “당신”은 나에게는 오늘의 왜가리였고, 어제의 저수지 바람이었으며, 늘 내 곁을 스쳐가는 작은 존재들이다.
밟힌 풀잎이 다시 일어나 바람에 떨 듯, 나 역시 일상에 지치고 주저앉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작은 용기를 배운다.
그저 가만히 떠는 풀잎이 되길 바라는 시인의 마음처럼, 나도 그런 겸손한 존재로 저수지 앞에 서 있다.

왜가리는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내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그대가 내 가슴에 별이 된다는 말이 꼭 닿았던 순간.
내가 밟고 지나가는 모든 들풀과, 스쳐가는 바람, 그리고 오늘 만난 왜가리 한 마리까지, 모두가 내게는 별처럼 빛나는 존재다.

그렇게 오늘도 신대저수지 길을 걸으며 나는 ‘당신’을 생각한다.
이름 없는 존재들이 나를 위로하고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하루였다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속삭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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