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건너편의 여자 - 김정란

나안 2021. 5. 29. 13:42

건너편의 여자
                                        김정란
 
오늘 저녁엔 한번 찬찬히 살펴보시길
 
봄비 스스로 내리는 저녁 무렵
혹시 당신의 양복 뒷단을
희고 찬 낯선 손이 몰래 다가와
살며시 잡아당기지는 않는지
 
혹시 당신 아파트 문 위에
손톱자국이 나 있지는 않은지
자동응답기에 숨죽인 흐느낌이
녹음되어 있지 않은지
 
당신이 시내로 들어가는 전철을 기다리면서
일간지에 코를 박고 있는 동안, 그리곤
불 밝은 전동차 안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가는 동안
혹시, 건너편, 시외로 빠져나가는 플랫폼
어두운 한구석에 숨어서 한 여자가 당신을
막막히 애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그녀가 가슴을 불어가는 바람을 견디느라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고 있지는 않은지
 
당신이, 문 밖으로 쫓아버린 여자
당신이,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 잊어버린 여자
 
그 여자, 당신의 일상이 잊어버린, 그러나
어쩌면 당신의 영혼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필사 -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흰 부추꽃으로 - 박남준  (0) 2021.05.29
'아줌마'라는 말은 - 김영남  (0) 2021.05.29
내어주기 - 김승희  (0) 2021.05.29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0) 2021.05.29
결혼에 대하여 - 칼릴지브란  (0) 2021.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