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 - 김용택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 오는데 뭔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 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헌다요, 뭔 소용이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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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처럼 피어 있어도, 당신이 오지 않으면
가을 산은 곱다.
단풍이 불붙은 듯 물들고, 물빛은 맑고, 억새는 하얗게 손짓한다.
그런데 김용택 시인은 묻는다.
“뭐헌다요?”
이 얼마나 슬프고 절실한 물음인가.
시인은 이 가을의 풍요와 아름다움 앞에서 오히려 결핍을 노래한다.
산이 아무리 곱고, 달빛이 얼굴처럼 걸려 있어도,
“당신 안 오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다.
그리움은 그렇게 풍경을 무색하게 만든다.
산도, 물도, 억새꽃도, 달빛도
‘그대 없음’ 앞에선 모두 헛된 장식일 뿐이다.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헌다요, 뭔 소용이다요”
이 부분은 정말 뼛속까지 저린다.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는 들판에 피어난 하얀 들국처럼,
한 사람을 기다리며 묵묵히 마음을 내어준 시간이
가을 끝자락처럼 쓸쓸하게 지나가는 그 풍경이 눈에 선하다.
들국은 소박하지만 질기게 피는 꽃이다.
그 꽃은 시인의 마음 그 자체일 것이다.
기다림이 지나쳐 이제는 지푸라기처럼 마른 마음,
서리처럼 하얗게 말라붙은 감정.
하지만 그래도 꽃은 피어 있다.
그래서 더 아프다.
그렇게 애를 써도, 그렇게 견뎌도
당신이 오지 않으면, 그 모든 게 헛것 같아서.
이 시를 읽고 나면,
가을 풍경이 더는 ‘예쁘다’는 말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어쩌면 진짜 가을은
그리움이 짙게 물든 마음 한 자락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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