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의 입구 신현락 개심사 가는 길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 나무들 서둘러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 추위를 털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길도 금세 눈으로 소복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길에서 나는 몇 번이나 개심(改心)하였을까 한 송이 눈이 도달할 수 있는 평심(平心)의 바닥 그것을 고요라고 부를까 하다가 산문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느 자리, 어느 체위이건 눈은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이 고요한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허지만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저지른 저 고요의 영역 표시 경계 앞에서도 어쩔 수 없는 방심(放心) 뒤에 진저리치던 나의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 하물며 개심(開心)이라니! 그 구멍의 뿌리 모두 바닥에 닿아 있으므로 길은 불평의 바닥이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 하지 말자 눈이 내렸을 뿐 나는 아직 고요의 입구에 있는 것이다 |
추억의 길목에서, 고요의 입구로
서산 개심사는 내게 조금 특별한 장소다. 고향집에서 30리 남짓 떨어진 곳, 초등학교 시절에는 자주 소풍을 가던 곳 중 하나였다. 그때는 그저 숲 좋고 한적한 절이려니 했는데, 훗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첫머리를 장식한 유명한 사찰임을 알고는 남몰래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지금은 가끔 고향에 갈 일이 생기면, 잊지 않고 들러보고 싶은 추억의 장소로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 개심사를 배경으로 한 시를 만났을 때의 반가움이란.
신현락 시인의 시 「고요의 입구」는 바로 그 ‘개심사(開心寺) 가는 길’에서 시작한다.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세상의 모든 소음과 굴곡을 덮어버린 풍경. 어린 시절의 기억처럼 아늑하고 평화로운 그 길 위에서, 시인 역시 완전한 ‘고요’와 흔들림 없는 ‘평심(平心)’을 기대하는 듯하다.
시인의 시선은 처음엔 불평 없이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눈의 속성을 향한다. 눈은 “어느 자리, 어느 체위이건 불평하지 않”고, 심지어 평평하지 않은 상태(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으로 만들어 버린다. 설경이 고요해 보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이 완벽한 평화의 상태를 ‘고요’라 부르려 하며, 그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산문 앞에 선다. ‘여기에 오기까지 나는 몇 번이나 마음을 바꾸었던가(改心하였을까)’라는 자문은, 이 이상적인 경지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성스러운 풍경의 한가운데에, 시인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흔적을 발견한다. 바로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 마을 개구쟁이들이 저지른 이 행위는 완벽한 고요의 세계에 난데없이 뚫린 구멍이자,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현실이다. 이 예상치 못한 ‘고요의 영역 표시’는 시인이 애써 쌓아 올리던 명상의 세계에 균열을 낸다. 그리고 그 균열은 곧 자기 자신을 향한 통렬한 성찰로 이어진다.
나의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
하물며 개심(開心)이라니!
시인은 저 오줌구멍에서 자신의 내면을 본다. 그토록 심각하게 여겼던 자신의 번뇌와 불평이, 실은 저 보잘것없는 ‘작은 구멍’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 깨달음 앞에서 마음을 연다는 ‘개심(開心)’이라는 목표는 얼마나 허황하고 거창하게 들리는가. 그는 길의 본질을 다시 정의한다. 길은 고요와 평심으로 향하는 이상적인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불평의 바닥”이다. 불평하지 않으며 이 길을 다 갈 수는 없다는 역설. 삶이란, 수행이란, 불평과 번뇌를 완벽히 제거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들과 동행하며 그 바닥을 딛고 나아가는 과정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결국 시인은 ‘한 소식 들은 척’하는 자기기만을 거부한다. 눈이 내린 것은 자연 현상일 뿐, 자신이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는 신호가 아니다. 그는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고요의 입구”에 서 있을 뿐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시를 읽고 나니, 언젠가 다시 찾을 개심사 가는 길이 새롭게 느껴진다. 그 길은 더 이상 완벽한 평온을 찾아가는 길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나의 수많은 불평과 번뇌를 짊어지고, 삶의 작은 구멍들을 인정하며 걷는 길. 그렇게 모든 불완전함을 끌어안고서야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곳.
그곳이 바로 추억 속 나의 개심사이자, 시인이 말한 ‘고요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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