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찔레 - 문정희

나안 2023. 6. 4. 11:49

찔레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 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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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은 순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예쁘고도 아픈 가시가 있다.

문정희의 시에서 찔레는,
이루지 못한 사랑과 지나간 아픔,
그리고 그것을 껴안은 현재의 나를 상징한다.

사랑이 끝나고 남은 건 눈물뿐이었지만,
그 눈물은 시간이 지나
꽃 속의 가시가 되었다.

이제 나는 그리움으로, 침묵으로,
한 그루 찔레처럼 초록 속에 서 있다.
아픔도 아름다움도 함께 달고서.

슬퍼하지 않고,
사랑으로 서 있는 것이
내가 사랑한 기억을 지키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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