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부부 - 오창렬, 문정희, 함민복

나안 2019. 3. 15. 09:41

 

 

 

 

 

 

부부
             오창렬

늘 허투루 나지 않은 고향 길
장에나 갔다 오는지 보퉁이를 든 부부가
이차선 도로의 양끝을 팽팽하게 잡고 걷는다
이차로 간격의 지나친 내외가
도시 사는 내 눈에는 한없이 촌스러웠다.
속절없는 촌스러움 한참 웃다가
인도가 없는 탓인지도 모르지
사거니 팔거니 말싸움을 했을지도 몰라
나는 또 혼자 생각에 자동차를 세웠다
차가 드물어 한가한 시골길을
늙어 가는 부부는 여전히 한쪽씩 맡아 걷는다.
뒤돌아봄도 없는 걸음이 경행經行같아서
말싸움 같은 것은 흔적도 없다
남편이 한쪽을 맡고 또 한쪽을 아내가 맡아
탓도 상처도 밟아 가는 양 날개
안팎으로 침묵과 위로가 나란하다
이런저런 궁리를 따라 길이 구불거리고
묵묵한 동행은 멀리 언덕을 넘는다
소실점 가까이 한 점된 부부
언덕도 힘들지 않다

* 경행經行 : 질병과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불경을 외우면서 복을 빌던 민간불교행사.
부부
          문정희

부부란 여름날 멀찍이 누워 잠을 청하다가도
어둠 속에서 앵 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나머지를 어디다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 보는 사이이다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부부란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오도 가도 못한 채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부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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