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잘 익은 사과, 납작납작, 별을굽다 - 김혜순

나안 2019. 6. 8. 14:31

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 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랄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사람의 마음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을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믈오믈 잘도 잡수시네요

 

 


납작납작-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김혜순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
하나님, 보시니 마땅합니까?

 

별을 굽다

                                  김혜순

 

사당역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서

뒤돌아보다 마주친 저 수많은 얼굴들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 냈을까

 

무표정한 저 얼굴 속 어디에

아침마다 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밖에서는 기척도 들리지 않을 이 깊은 땅속을

밀물져 가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하늘 한구석 별자리마다 쪼그리고 앉아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 내는 분 계시겠지만

그분이 점지하는 운명의 별빛 지상에 내리겠지만

물이 쏟아진 듯 몰려가는

땅속은 너무나 깊어

그 별빛 여기까지 닿기나 할는지

 

수많은 저 사람들 몸속마다에는

밖에선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거리나 보다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 보다

 

저렇듯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얼굴을 구워 내고 있었으니

모든 얼굴은 뜨거운 심장이 굽는 붉은 흙 가면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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