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연탄 한 장 - 안도현

나안 2021. 1. 12. 13:17

연탄 한 장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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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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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 한 장처럼
나는 누구를 따뜻하게 한 적이 있었나?

없다.
누군가의 방을 데우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태운 적, 없다.
내가 먼저 따뜻하려 했지
누군가를 위해 뜨거워진 적은 없다.

매일 밥을 먹고 따뜻한 물을 마시면서도
그 온기가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받기만 했다.
주는 일에는 인색했다.

연탄은, 불이 붙으면 말없이 타올랐다.
그 뜨거움이 다 사라져
한 줌의 재로 남을 줄 알면서도
다른 이의 겨울을 위해 온몸을 던졌다.

나는 그런 적이 없다.
아니, 감히 그럴 마음조차 없었다.
무언가를 나눠줄 용기도 없었고
내 온몸으로 길을 내본 적도 없다.

살아간다는 건,
산산이 부서져 누군가의 길이 되는 일이라고
시인은 말했지만

나는
그 누구에게도
연탄 한 장 되어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