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집 이훤 세계에 검열 당하고 나에게 외면당해 잉태되지 못한 감정들 모여 내밀히 일으키는 데모 누군가는 그것을 우울이라 불렀다 이따금 정당하기도 했다 |
내 안의 조용한 시위
이훤 시인의 시 「군집」은 아주 짧은 시지만, 그 안에는 깊은 고요와 눌린 분노, 그리고 이해받지 못한 감정들이 웅크리고 있다. 겉으론 조용하지만 내면에서 일렁이는 불온한 움직임, 그것을 시인은 “내밀히 일으키는 데모”라고 표현한다. 표현되지 못한 감정들이 떼 지어 속에서 시위한다는 이 이미지가, 묘하게도 현대인의 일상과 깊이 맞닿아 있다.
“세계에 검열 당하고 / 나에게 외면당해”
이 첫 구절은 날카롭다. 우리는 감정을 스스로도 외면하고, 바깥 세상으로부터는 검열당한다. 슬픔이나 분노, 질투 같은 감정은 드러내는 순간 ‘유치하다’거나 ‘연약하다’는 딱지가 붙고,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렇게 억눌린 감정은 어디로 갈까? 시인은 그것들이 군집하여 내면 어딘가에서 데모를 일으킨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우울이라 불렀다 / 이따금 정당하기도 했다”
이 마지막 구절이 특히 마음에 남는다. 우울은 때때로 설명되지 않고, 이유 없는 슬픔처럼 여겨지지만, 그 뿌리는 분명히 있다. 우리가 눌러두었던 감정, 억눌렀던 생각들이 모여 만든 정당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니 우울은 질병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하나의 저항일 수도 있다. 자신을 위한 정당한 시위 말이다.
이 시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말하지 못한 감정, 외면해온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모이고 쌓이고 군집을 이루어, 언젠가 우리 마음속에서 조용하지만 분명한 함성을 터뜨린다. “나도 힘들다”고, “이건 정당한 감정”이라고.
시를 읽고 나니, 문득 내 안에 눌러둔 감정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보고 싶어진다. 나조차 외면했던 그 감정들을 조용히 마주하고, 들여다보고, 받아들이는 시간. 어쩌면 그것이 우울이라는 ‘군집’에 정당한 자리 하나를 내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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