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정말 그럴 때가 - 이어령

나안 2021. 6. 26. 16:41

정말 그럴 때가
                  이어령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것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놓았던 작은 신발들
내 편지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소리 들은
지금 모두
다 어디 있는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흉터에 대하여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