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팥죽을 먹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들었다.
그 작은 갈망이 충족되자 마음의 안쪽에 평안이 깃든다.
머리칼이 어느덧 희끗희끗해졌건만 나는 아직 양을 길러본 적이 없다.
고원을 오른 적도 없고,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넌 적도 없다.
젊은 날의 방황과 사업, 그리고 책 몇권을 썼다.
늙는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내 무릎 관절은 삐걱거리고, 피부엔 잔주름과 점들이 늘었다.
내 안에서 탕약(湯藥)처럼 끓던 갈망은 덧없이 사그라졌다.
젊은 날엔 대단한 것을 욕망하고 거머쥐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지만
삶이 풍성해지는 것은 무엇을 더 많이 해서가 아니다.
무엇을 하지 않음으로써 삶은 오히려 풍성해진다.
욕심을 덜어내고 어리석음을 피하며,
소박한 것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이다!
나이가 들어 찾아온 체념과 달관이 새삼 고맙다.
가을, 가을 하더니
가을도 절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여름은 지나치게 빨리 오고, 너무 늦게 떠나고
가을은 너무 늦게 오고, 너무 빨리 떠납니다.
기상청의 분석과 상관없이
나이 들 수록 세월의 속도가 빨라지지만
특히 가을은 더욱 빨리 지나갑니다.
새 잎이 돋고
꽃이 피는 첫번째 봄
파랗던 그 잎들이
꽃이 되는 두번째 봄,
이제는 하나 둘
노란 옷, 빨간 옷
옷을 벗어
드디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있는
벌거벗은 나무를
설레는 맘으로 지켜봅니다.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밴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신경림 / 나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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