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우산을 잃어버리다 - 김기택

나안 2019. 8. 26. 10:34

잃어버린 우산, 그리고 내 안의 빈자리

누군가 말했었다.
“우산은 내 것이 아니고, 잠시 빌려 쓰는 거야.”
그 말이 그때는 그냥 지나가는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우산을 잃어버린 날, 문득 그 말이 마음 깊은 곳을 툭 건드렸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버스를 타면 우산은 늘 어색하다. 내 손에 있긴 하지만, 마치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존재처럼 이리저리 부딪히고, 남의 바지를 슬쩍 적시기도 한다. 그러다가 한순간, 내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조용히 사라진다. 마치 애초부터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김기택 시인의 「우산을 잃어버리다」는 그런 순간을 아주 세밀하게 잡아낸다. 우산을 잃어버리는 일이 단순히 물건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내 삶의 작은 조각 하나가 빠져나가는 순간이라는 걸 말해준다.

비가 내리는데 내 손에 우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세상은 마치 나에게 벌을 주듯 더 세차게 비를 퍼붓는다. 그건 우산을 잃어버린 내 책임이 아니라는 걸 비도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어깨를, 내 머리를, 내 마음까지 후드득 두드린다. ‘네가 뭘 잃어버렸는지 제대로 알아봐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우산뿐일까?
사람도, 기억도, 사랑도 결국 언젠가 잃어버릴 것을 알면서 잠시 내 품에 두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뭔가를 잃어버릴 때마다 마음이 헛헛해지는 건 그 순간 내 손에 남아있는 것이 '없음'이라는 감각 때문일 것이다.

우산을 잃어버리고, 비를 맞으며 걷는 그 순간이, 사실은 내 안에 있었던 무수히 많은 잃어버림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게 비는 더 세차게 퍼붓는다.
"너, 우산만 잃어버린 게 아니야."
비는 그렇게 조용히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모든 걸 잃어버린 듯한 순간에, 세상은 다시 평온해진다.
비가 그치고 나면,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우산을 접고, 웃고, 바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 모든 ‘잃어버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잃어버린 우산처럼, 언젠가는 또 다른 ‘무언가’를 잃고 말 것이다.








우산을 잃어버리다 
김기택


버스에 오르자마자 우산은 갑자기 난처해졌다
우산은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가
남의 바지를 두어 번 슬쩍 적셨다가
좌석에 잠깐 기댔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구두들에게 밟혔다가
슬픈 눈이 잠시 헛것에 초점을 맞추는 사이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슬며시 없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던 비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우산을 찾았으나
우산은 제자리에 깊이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잃어버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이
오래전부터 비가 그치기만 하면 사라졌다는 듯이
우산은 민첩하게 제 길을 찾아냈다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듯
스스로 찾아낸 자리를 영영 떠나지 않았다

비가 내렸으므로 나는 다시 우산이 필요했다
비가 더 많이 내렸으므로 잃어버린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해졌다
떨어진 꽃잎들은 껌처럼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사람들 손에는 하나같이 우산이 들려 있었다

우산들은 어떻게 공기 속에서 비의 냄새를 찾아내어
첫 빗방울이 떨어지자마자 활짝 펴지는 것일까
눈물은 어떻게 슬픔이 지나가는 복잡한 길을 다 읽어 두었다가
슬픔이 터지는 순간 정확하게 흘러내리는 것일까
저 많은 꽃들은 어디에 숨어 있었다가
봄과 나뭇가지에 마련된 자리를 찾아와 한꺼번에 터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면 저 많은 우산들은
어떻게 제 이름이 새겨져 있는 자리를 찾아 일시에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

흙바닥에 뒤엉켜 있는 꽃잎들은
어떻게 한 치의 오차 없이 저 자리를 찾아낸 것일까
슬픔이 흘러나오던 자리는 어떻게 감쪽같이 명랑해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자마자 저 많은 손들은
어떻게 우산을 잃어버린 걸 완벽하게 잊은 것일까

내 손에 우산이 없는 걸 보고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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