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기타

사기에서 만난 말(5)

나안 2022. 5. 28. 22:47

有白頭如新 傾蓋如故 何則 知與不知也
유백두여신 경개여고 하즉 지여부지야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오랫동안 교제하더라도 새로 사귄 사람과 같고,
첫 만남이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과 같기도 하다고 했는데,
이는 왜입니까?
바로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의 차이 때문입니다.


사기, 노중련추양열전 중에서

진정한 관계는 시간보다 이해에서 나온다

“백발이 되도록 알고 지냈어도 여전히 낯선 사람이 있고,
잠깐 수레 덮개를 기울여 인사했을 뿐인데도 마치 오래된 벗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무엇 때문인가? 서로를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이 고전 구절은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통찰 중에서도 가장 깊고 날카로운 말 중 하나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오랜 친구, 수십 년의 인연이라 해도
정작 그 속을 들여다보면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맴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반면, 단 하루, 혹은 짧은 대화 속에서도
서로의 마음이 통하고, 상처와 기쁨의 결을 공유하는 사람도 있다.
이럴 때 우리는 “마치 오래 알던 사람 같았다”는 말을 한다.
그것이 바로 고전에서 말한 “경개여고(傾蓋如故)”
"잠깐 인사했을 뿐인데, 옛 친구처럼 친숙하다"는 느낌이다.


고대에는 혈연, 지연, 학연 같은 ‘관계의 거리’가 매우 중요했지만,
우리에게 진정한 관계는 시간보다 ‘이해’에 있다고 말한다.
이해가 없는 관계는 오래 지속되어도 공허하고,
이해가 있는 관계는 짧아도 깊이 있고 따뜻하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얕게 연결되어 있다.
팔로우와 좋아요가 우정을 대신하고,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람도 마음의 말 한마디 건네기 어렵다.
그럴수록 이 문장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관계의 본질은 얼마나 오래 함께 있었는가가 아니라,
서로를 얼마나 깊이 이해했는가이다."


이 말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더 정직하고, 더 충실하게 누군가의 곁에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智者千慮 必有一失 지자천려 필유일실
愚者千慮 必有一得 우자천려 필유일득
지혜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의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얻음이 있을 수 있다
.

사기,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지혜로운 이가 천 번을 생각해도 한 번은 실수할 수 있고,
어리석은 이가 천 번을 헤매도 한 번은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한 겸손의 교훈을 넘어,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때로, 누군가의 말이 미숙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 사람 전체를 미숙하다고 단정짓는다.
반대로,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겨 타인의 조언을 무시하거나
스스로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지혜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아는 데서 비롯된다.

어쩌면 지혜란, 끊임없이 실수하고 깨지며,
그 안에서 배우고 반성하는 반복의 과정
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리석음이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자신의 틀에 갇혀 다른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일 수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완벽한 사람’을 닮고 싶지 않다.
대신, 실수 앞에서도 유연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
다른 이의 말 속에서 조용히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도 나는 생각한다.
혹시 내가 놓친 어떤 진실을,
지금 곁에 있는 누군가가 이미 말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夫貪小利以自快 棄信於諸侯
失天下之援 不如與之

부탐소리이자쾌 기신어제후
실천하지원 불여여지
작은 이익을 탐해 스스로 만족한다면 제후들의 신뢰를 잃고,
천하의 지지를 잃는 것이니 돌려주느니만 못합니다

사기, 자객열전(刺客列傳) 

함께 가야 멀리 간다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자신만 만족하고, 신의를 저버린다면
세상의 도움을 잃게 되니, 차라리 함께하는 것이 낫다.”

이 말은 고대의 제후들 사이에서 외교와 협상의 중심이던 ‘신뢰’의 가치를 강조한 구절이다.
놀랍게도, 이 말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기업 경영, 조직 운영, 인간관계 모든 영역에서 똑같이 유효하다.

오늘날에도 단기적 이익을 좇다 관계를 망치는 이들이 많다.
가격을 낮춰 고객을 유인하지만 품질은 떨어지고,
성과를 높이려 무리하게 경쟁하지만 팀워크는 무너진다.
그 결과는 늘 같다 — 신뢰 상실과 고립.

신의는 겉보기에 느리지만, 결국 가장 멀리 가는 기반이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함께 오래 가려면
‘나만 잘되는 길’이 아닌 ‘함께 살아남는 길’을 택해야 한다.

요즘처럼 빠르게 판단하고 소비되는 시대일수록
오히려 이 고전의 문장이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작은 이익보다 신뢰를, 단기 성과보다 장기 관계를”

— 이것이 진짜 지속가능성이다.


豪氂不伐 將用斧柯 
호리불벌 장용부가
터럭같이 작을 때 베지 않으면 장차 도끼를 써야 한다

사기, 소진열전(蘇秦列傳) 

먼저 자를 것

처음엔
작은 무례였다
눈길을 피하는 습관
대답 없는 메시지
비꼬인 말투 한 줄

별일 아니겠지,

내가 예민한 걸지도
스스로를 타이르며
넘겼다
참았다
믿었다

하지만
무시되는 건 금세 익숙해지고
무시하는 건 더 빠르게 자란다


한 가닥 실금이
관계 전체를 파고들고
마침내 균열이 터질 때쯤이면
말은 무기고
마음은 도끼다


사람은 멀어지기 전에
한 번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건 아니라고
거기까지라고


말하지 못한 모든 침묵은
언젠가 스스로를 자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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