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시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 이기철

나안 2023. 3. 14. 09:00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놓아 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놓아 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청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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