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작가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를 만났다.
작가가 하는 연필로 쓰는 창작과
다른 작가의 작품을 보고 베껴쓰는 필사와는
물론 차원이 다른 얘기다
그럼에도 연필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필기 도구를 이용하여
필사를 하는 나의 지금과
아주 조그마한 동질감이라도 얹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작가의 손으로 쓴 원고를 보면서
'나무'같은 낱개 글씨의 모양과는 상관없이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진 문장들에서
수려하고 살아있는
그리고 시원한 '숲'을 감상한다.
책의 제목은
정진규 시인의 시 "연필로 쓰기"와 같다고 작가는 일러준다.
한번 쓰고나면 그 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에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한다는 ...
그러다 문득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워야하니까
라는 80년대 유행가 가사도 떠오른다.
지울 수 있는 인생,
지울 수 있는 사랑이 있다면
과거의 어느 부분을 지워야 할까?
남아 있는 날 중에서
그런 인생,
그런 사랑이 가능하다면
어떤 것들을 시도해 볼까?
책의 내용과는 별반 상관없이
이러저런 생각들을
쌌다 지워졌다를 반복한다
연필로 쓰기
정진규
한밤에 홀로 연필를 깍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던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워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