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기타 45

눈이 부시게 中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필사 - 기타 2019.03.20

나목 - 신경림

오랜만에 팥죽을 먹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들었다. 그 작은 갈망이 충족되자 마음의 안쪽에 평안이 깃든다. 머리칼이 어느덧 희끗희끗해졌건만 나는 아직 양을 길러본 적이 없다. 고원을 오른 적도 없고,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넌 적도 없다. 젊은 날의 방황과 사업, 그리고 책 몇권을 썼다. 늙는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내 무릎 관절은 삐걱거리고, 피부엔 잔주름과 점들이 늘었다. 내 안에서 탕약(湯藥)처럼 끓던 갈망은 덧없이 사그라졌다. 젊은 날엔 대단한 것을 욕망하고 거머쥐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지만 삶이 풍성해지는 것은 무엇을 더 많이 해서가 아니다. 무엇을 하지 않음으로써 삶은 오히려 풍성해진다. 욕심을 덜어내고 어리석음을 피하며, 소박한 것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이다! 나이..

필사 - 기타 2018.10.29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엊그제 헌법재판소장 청문회에서 후보자가 낭독했다해서 알게 된 시 누군가 나에게 시가 뭐냐고 묻지는 않겠지만 누군가 나에게 너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 대답할까 갑자기 막막해질 것 같다. 오래 묵은 명함을 정리해본다. 명함의 주인 일부는 회사가 바뀌었든지 아니면 그만 두었든지 아니면 011, 0..

필사 - 기타 2017.11.23

술잔을 들며-백거이

對酒(대주) / 백거이(白居易 772~846)蝸牛角上爭何事(와우각상쟁하사)달팽이 뿔 끼리 싸움은 웬 일인가石火光中寄此身(석화광중기차신)부싯돌 번쩍이는 찰나 같은 인생인데隨富隨貧且歡樂(수부수빈차환락)부자건 가난하건 그런대로 즐겁거늘不開口笑是痴人(불개구소시치인)입 벌려 못 웃는 자 이 또한 바보일세白樂天(자(自)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와 취음선생(醉吟先生), 시호는 문(文). 허난성[河南省] 신정현[新鄭縣] 사람)이 장안에서 형부시랑 벼슬할 때 지은 "對酒"라는 제목의 다섯 수의 시 중 하나로, 莊子에 나오는 달팽이 우화와 도척과 孔子의 일화를 빌려 지었다. 어차피 짧은 인생인데 대범하고 낙천적으로 살라고 권한다. 마음 맞는 친구와 술잔을 마주할 때 권주가로 읊조리기에 어울리는 시이긴 하지..

필사 - 기타 2010.04.02